-
대감(大監)바위
김포시 굿우물에 중봉(重峰)선생을 재향한 우저서원(牛著書院)이 있고, 이 동네 좌측 벌판을 동쪽으로 흘러 나진교(예전의 나진나루터)를 지나서 한강 본류에 이르는 지류가 있다.
이 지류가 한강과 합류하는 강기슭에는 조그마한 비 뿌리가 있고 강 안에는 약 7~8평쯤 되는 넓은 바위가 강심(江心)을 향해 있어서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잔교와 같다. 그것은 나룻배나 어선의 이착에 매우 편리하게 이용되었다. 운양리 감암포(甘岩浦)에 있는 이 바위를 '감바위', 이 나루터를 '감바위 나루터'라 부르는데 이 바위에 서린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의 왜구침략설이 무시된 채, 조선조정은 당쟁에 편할 날이 없이 국방을 소홀히 했다. 외침을 걱정하던 율곡(栗谷)선생은 10만 양병을 주장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 파주로 낙향하셨고, 율곡의 문인이었던 중봉선생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시다 뜻을 이루지 못하매 벼슬을 굿우물에 냑향하셔서 자연을 벗삼아 우국지정(憂國之情)을 달래고 있었다. 때로는 편주(扁舟)에 몸을 맡기고 나진나루터를 지나 한강변에 나가서 넓은 바위에 앉아 강심에 낚시를 드리우고 장차 몰려올 왜구들의 노략질에 치를 떠셨고, 무심히 노니는 갈매기를 보면서 당쟁에 여념이 없는 조정의 간신배들의 작태에 한숨지으며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으셨다.
지당(地塘)에 비뿌리고 양류(楊柳)에 내 끼인 제
사공은 어디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夕陽)에 무심(無心)한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노라
평사(平沙)에 낙안(落雁)하고 황촌(荒村)에 일모(日暮)로다
어선도 돌아들고 백구(白鷗) 다 잠들 적에
빈 배에 달 실어 가지고 강정(江汀)으로 가리라
하루는 중봉선생께서 나루터 넓은 바위에 앉아 낚시를 드리우고 시름에 잠겼을 때 밀려오는 널빤지를 발견했다. 건져보니 그것은 우리나라산 나무가 아니라 일본의 삼복(杉木)이었다. 중봉선생은 일본이 많은 전선을 만들므로 해서 그 삼목의 조각들이 조수를 따라 떠밀려온 것임을 알고 그 널판조각에다 그 사연과 함께 왜구의 침공을 막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이 역시 무시되었다. 급기야 임진년 4월에 왜구는 많은 전선을 이끌고 부산에 쳐들어온 지 불과 두 달만에 조선 천지를 노략질하매 선조는 의주로 몽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관군은 물론, 의병들이 각처에서 일어나 왜구를 무찔렀다. 중봉선생도 신나수(申蘭秀), 장덕개(張德蓋)등 의병장들과 3천 의병을 거느리고 승병장 영규(靈圭)의 5백 승병을 합해서 왜군에게 함락되었던 청주를 탈환하고, 그해 8월 금산 역시 탈환하였다. 그러나 수 배의 왜적과 싸우시다 중과부적으로 7백의 결사대는 끝내 순절(殉節)하고 말았다. 현재 금산의 칠백의총(七百義塚)은 그분들의 넋을 모신 곳이며, 굿우물의 우저서원은 중봉선생을 재향한 곳으로 우리고장의 자랑이자 정신적 지주로 삼는 곳이다.
그리하여 중봉선생님께 생전에 우국지정을 달래며 낚시하던 운양히 한강변의 넓은 바위를 '대감바위'로 불렀던 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대감바위의 대(大)자는 떨어져나가고 '감바위'로만 불리우고 있다. 현재는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여 중봉선생의 체취를 가까이서 느낄 수 없음이 안타깝다.
우저천(牛渚川)
계양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검단면 당하리, 마전리, 불노리와 김포시 나진교를 차례로지나 한강으로 유입한다. 전설에 의하면 중봉선생이 나진교 부근 내에서 낚시질하다가 자귀밥이 떠밀려오는 것을 보고 왜구가 전선(戰船)을 만들고 있음을 알고 왜구의 난을 예견했다고 전한다. 이 전설은 대감바위 전설의 부속 전설인 듯하다.
손돌공(孫乭公)
918년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여 제 23대 고종에 이르기까지 314년간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고려는 많은 수난을 겪었다. 1231년 몽고(원나라)가 침입하매, 고종은 화친을 내세워 일단 회군시켰으나. 그들이 계속 부당한 조공(朝貢)을 요구하므로 결사항전할 것을 결심하고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 때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었다.
이 곳은 앞이 막힌 듯이 보이는 지형으로 처음 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지라. 천도하는 고종도 심기가 불편한 나머지 뱃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노를 젓는 사공 손돌이를 의심하여 수차 뱃길을 바로잡도록 하명하였으나. 손돌이 아뢰기를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하오나 좀더 나아가면 앞이 트이오니 페하께서는 괘념치 마옵소서" 라고 아뢰였다.
고종은 마음이 초조하여, 손돌이의 흉계로 의심하고 신하들에게 손돌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고도 임금의 안전 항해를 바라는 충성에서 바가지를 물에 뛰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을 아뢴후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왕의 천도 항해는 손돌이의 바가지 안내대로 험한 협류를 무사히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왕은 늦게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을 후히 장사지내주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도 세워주었다 고 전한다. 그리고 이 뱃길목은 지금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르며, 공(公)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 쯤이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였다. 이 때의 거센 바람을 '손돌이 바람', 이 무렵의 추위를 '손돌이 추위'라 전해온다.
손돌공의 묘는 물 건너로 광성진이 보이는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공의 제사는 조선조말까지 계속되어오다가 일제 강점 후 중단되었었으나 1970년 이후 계속 지내오고 있으며, 묘는 1977년 박일양(朴一陽)씨 등과 면민들이 묘비를 세우고 치산(治山)하여 크게 단장하였다.
애기봉(愛妓峰)
유유히 흐르는 조강(粗江)물을 굽어보고 수백 길 높이 솟은 애기봉은 애절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병자호란때 일이다. 높새바람의 기세가 봄기운에 밀려 활기를 못 띠던 때, 기생 애기(愛妓)는 봄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며 평양감사와의 사랑을 막 피어나는 잔디 위에 수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하늘의 시기인가, 노여움인가, 두 사람의 운명을 모질고 슬프게 만든 변란이 일어났다. 북쪽 오랑캐(후의 청나라)의 침략과 노략질로 감사와 애기는 임금님이 계신 한양으로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못했으므로 걸어서 수천 리 길을 가야만 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수천 리를 걸어가야 하는 일이 힘겨운 노릇이었지만 감사는 따르는 애기는 참고 견디며 개풍군까지 왔으나, 감사는 오랑캐들에게 잡혀 복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감사와 생이별을 한 애기는 혼자 강을 건너 월곶면 조강리에 머물면서 감사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다.
하루하루 더해지는 감사에 대한 그리움으로 날마다 쑥갓머리산(하성면 가금리 소재) 정상에 올라 임계신 북녘을 향해 눈물로 소리치며 애타게 기다리다 병이 들어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명재경각(命在頃刻)의 애기는 임을 향한 그리움으로 매일 애타게 기다리던 산정(山頂)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다.
애기는 유언에 따라 동내 사람들은 애기를 쑥갓머리산 꼭대기에 장사하고 그 산을 애기봉(愛妓峰)이라 불러왔다.
지금 애기봉 정상에는 강 건너 북녘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서, 실향민들이 향수를 달래려 자주 찾는 망향(望鄕)의 동산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애기봉은 북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한으로 맺힌 곳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