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년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여 제 23대 고종에 이르기까지 314년간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고려는 많은 수난을 겪었다. 1231년 몽고(원나라)가 침입하매, 고종은 화친을 내세워 일단 회군시켰으나. 그들이 계속 부당한 조공(朝貢)을 요구하므로 결사항전할 것을 결심하고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 때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었다.
이 곳은 앞이 막힌 듯이 보이는 지형으로 처음 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지라. 천도하는 고종도 심기가 불편한 나머지 뱃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노를 젓는 사공 손돌이를 의심하여 수차 뱃길을 바로잡도록 하명하였으나. 손돌이 아뢰기를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하오나 좀더 나아가면 앞이 트이오니 페하께서는 괘념치 마옵소서" 라고 아뢰였다.
고종은 마음이 초조하여, 손돌이의 흉계로 의심하고 신하들에게 손돌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고도 임금의 안전 항해를 바라는 충성에서 바가지를 물에 뛰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을 아뢴후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왕의 천도 항해는 손돌이의 바가지 안내대로 험한 협류를 무사히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왕은 늦게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을 후히 장사지내주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도 세워주었다 고 전한다. 그리고 이 뱃길목은 지금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르며, 공(公)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 쯤이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였다. 이 때의 거센 바람을 '손돌이 바람', 이 무렵의 추위를 '손돌이 추위'라 전해온다.
손돌공의 묘는 물 건너로 광성진이 보이는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공의 제사는 조선조말까지 계속되어오다가 일제 강점 후 중단되었었으나 1970년 이후 계속 지내오고 있으며, 묘는 1977년 박일양(朴一陽)씨 등과 면민들이 묘비를 세우고 치산(治山)하여 크게 단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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