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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大監)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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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전설은 국가적, 지방적 영웅이나 그의 업적과 연관된 증거물에 대하여 역사적 사건에 기초적 지식을 가진 작자가 그 사건의 설명으로서 이야기하고, 그것이 민중의 기억, 지식에 결합되어, 전승된 것이다.
역사적 전설은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다고 하는 '확인되는 믿음'이 객관적 역사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상례이다. 전설의역사성을 '믿음의 역사'라 할 수 있어서 어느 정도 허구나 상상을 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실제로 일어났었다고 믿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그것은 전설이 지방사람들의 꿈과 당위와 필연으로 받들어졌던 신념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역사적 전설의 비극성 죽, 꿈과 이상이 실현되지 못한 좌절감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여 그 대상작용(代償作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헌(趙憲)선생과 관련된 전설 중에서 전형적 예를 볼 수 있다.
역사적 전설은 지역주민에게 인간으로서의 자기의식,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규범, 윤리의식, 행동지표를 제시하고 있어서 한 지방의 교실과 같은 기능을 해왔다.

 

대감(大監)바위

김포시 굿우물에 중봉(重峰)선생을 재향한 우저서원(牛著書院)이 있고, 이 동네 좌측 벌판을 동쪽으로 흘러 나진교(예전의 나진나루터)를 지나서 한강 본류에 이르는 지류가 있다.
이 지류가 한강과 합류하는 강기슭에는 조그마한 비 뿌리가 있고 강 안에는 약 7~8평쯤 되는 넓은 바위가 강심(江心)을 향해 있어서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잔교와 같다. 그것은 나룻배나 어선의 이착에 매우 편리하게 이용되었다. 운양리 감암포(甘岩浦)에 있는 이 바위를 '감바위', 이 나루터를 '감바위 나루터'라 부르는데 이 바위에 서린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의 왜구침략설이 무시된 채, 조선조정은 당쟁에 편할 날이 없이 국방을 소홀히 했다. 외침을 걱정하던 율곡(栗谷)선생은 10만 양병을 주장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 파주로 낙향하셨고, 율곡의 문인이었던 중봉선생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시다 뜻을 이루지 못하매 벼슬을 굿우물에 냑향하셔서 자연을 벗삼아 우국지정(憂國之情)을 달래고 있었다. 때로는 편주(扁舟)에 몸을 맡기고 나진나루터를 지나 한강변에 나가서 넓은 바위에 앉아 강심에 낚시를 드리우고 장차 몰려올 왜구들의 노략질에 치를 떠셨고, 무심히 노니는 갈매기를 보면서 당쟁에 여념이 없는 조정의 간신배들의 작태에 한숨지으며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으셨다.

 

지당(地塘)에 비뿌리고 양류(楊柳)에 내 끼인 제
사공은 어디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夕陽)에 무심(無心)한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노라
평사(平沙)에 낙안(落雁)하고 황촌(荒村)에 일모(日暮)로다
어선도 돌아들고 백구(白鷗) 다 잠들 적에
빈 배에 달 실어 가지고 강정(江汀)으로 가리라

 

하루는 중봉선생께서 나루터 넓은 바위에 앉아 낚시를 드리우고 시름에 잠겼을 때 밀려오는 널빤지를 발견했다. 건져보니 그것은 우리나라산 나무가 아니라 일본의 삼복(杉木)이었다. 중봉선생은 일본이 많은 전선을 만들므로 해서 그 삼목의 조각들이 조수를 따라 떠밀려온 것임을 알고 그 널판조각에다 그 사연과 함께 왜구의 침공을 막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이 역시 무시되었다. 급기야 임진년 4월에 왜구는 많은 전선을 이끌고 부산에 쳐들어온 지 불과 두 달만에 조선 천지를 노략질하매 선조는 의주로 몽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관군은 물론, 의병들이 각처에서 일어나 왜구를 무찔렀다. 중봉선생도 신나수(申蘭秀), 장덕개(張德蓋)등 의병장들과 3천 의병을 거느리고 승병장 영규(靈圭)의 5백 승병을 합해서 왜군에게 함락되었던 청주를 탈환하고, 그해 8월 금산 역시 탈환하였다. 그러나 수 배의 왜적과 싸우시다 중과부적으로 7백의 결사대는 끝내 순절(殉節)하고 말았다. 현재 금산의 칠백의총(七百義塚)은 그분들의 넋을 모신 곳이며, 굿우물의 우저서원은 중봉선생을 재향한 곳으로 우리고장의 자랑이자 정신적 지주로 삼는 곳이다.
그리하여 중봉선생님께 생전에 우국지정을 달래며 낚시하던 운양히 한강변의 넓은 바위를 '대감바위'로 불렀던 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대감바위의 대(大)자는 떨어져나가고 '감바위'로만 불리우고 있다. 현재는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여 중봉선생의 체취를 가까이서 느낄 수 없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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