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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촌,왕릉의 묘소,독우물

교육지원청안내김포이야기전해오는이야기설명적전설봉화촌,왕릉의 묘소,독우물
설명적 전설은 그 지역의 지리상의 특징, 자연현상, 동식물의 특수한 형상, 강, 산, 바위 등 특수한 증거물에 대해 소박한 지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기존의 전설에 후세인들이 설명의 요소를 첨가해서 윤색(潤色)된 내용도 상당 수 있다.
설명적 전설은 지역주민과 자연과의 교섭자, 자연과 문화 사이의 교섭자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그것은 지역주민들의 자기인식의 생활사, 문화사라고 할 수 있다.
전설은 전설일 뿐 정사(正史)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지명 '金浦'의 유래에 대한 전설에서는 양천(陽川)의 전설에 '投金浦(灘) → 金浦'로 전해지지만, 1914년 이전에는 김포, 통진 양천이 각각 별개의 군이었다가 같은 해에 3군이 김포로 통합되었으므로 양천과 김포와는 관계가 없었다. 또한 '投金浦'전설의 시대적 배경은 고려 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명 '김포'가 확정된 것은 신라 경덕왕 때이다.
형제투금(兄弟投金)은 전국적으로 전승되어온 형제우애를 주제로 한 민담(民譚)의 화소(話素) 중 하나로 '금덩이를 물에 던지다' → '金浦'의 전설구조를 만들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전설과 역사 사이의 갈등은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봉화촌(烽火村)

조선조에 이 고을 뒷산에 봉화(烽火)가 있어서 해적(海賊)이 침입할 때 이 봉화에 불을 붙여 관가에 즉시 알려 지원병을 요청하던 것으로써 그 시대에는 없어서 안 될 주요한 통신수단이었다.
그 시대에는 장작을 피울 수 잇는 시설이 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 그 산에 올라가면 그 시대의 봉화가 있었던 흔적을 발견 할 수 없다. 그 시대에 종종 소규모의 왜군이나 해적들이 쳐들어와서 이곳을 점령하여 많은 여자를 겁탈하고 납치하여 이 지방의 방위(防衛)를 튼튼히 하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화를 설치하여 많은 해적들과 왜군을 잡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지원병을 요청하기 위해서는 봉화가 필수적이어서 이 마을의 젊은 총각들은 항상 교대로 이 봉화를 지켰다고 하여 이 마을을 봉화촌(烽火村)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검단면 오류리의 봉화촌이 그 곳이다.

왕릉의 묘소(王陵의 묘소)

왕족의 묘소가 있는 곳은 대곶면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수안산(守安山)줄기에서 남쪽으로 쭉 뻗은 산능선 중턱이다. 옛부터 땅이 좋고 훌륭한 인물이 많이 탄생된다고 한다.
이 묘소는 약 400년전에 미상의 왕이 강화에 행차하다가 이곳에서 하룻밤을 쉬고 가려다 왕자가 태어났는데 곧 사망하여 이곳에 매장하였다 하여 이 지역을 대능리(大陵里)라고 칭하여 왔다.

독우물

조선조 세종대왕때 경상도 청송군(靑松郡)에 심연원(沈連遠)이라는 총명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 소년이 어찌나 총명했던지 6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14세에 영의정에 승진하여 국정을 다 맡다시피 하던 중, 24세때 좌찬성(左贊成) 박완(朴浣)의 모해(謀害)를 받아 강화로 유배되어 십이년을 보내다가 다시 세종대황의 부름을 받아 영의정으로 봉충(奉忠)하던 중 63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세종대왕께서 국장을 하명하시어 이 분의 유배지인 강화도 남문안에 안치(安置)하라는 분부(吩附)를 거행(擧行)하기 위해 강화로 가기 위해 이곳을 지나다가 상여의 장강 나무가 부러져 행렬을 쉬고 있던 중 도승(道僧)한 사람이 나타나 상주(喪主)에게 말하기를 매인의 운세를 보아 강화도 남문안에 안치하면 후일에 기운이 좋지 못할 것이니 소승이 자리를 보아주겠다 하고, 지금 이 곳에 안장하라는 말을 들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도승의 말이 산소를 만들되 물은 반드시 처음 발견된 하단부위 물을 사용하고 광중을 파되 바위가 비칠 것이니 이를 파괴하지 말고 모시라 했다. 만일 바위를 파괴하면 명기(明氣)가 날으며 명기 가운대 왕벌이 날 것이요, 왕벌이 날면 소승은 왕벌에게 쏘여 죽을 것이고 소승이 소재하는 절도 폐허(廢墟)가 되고 상주(喪主)의 후손에게 벼슬이 끊기고 손(孫)이 귀해질 것이라는 당부를 하면 도승은 이미 산성(山城) 나루(지금의 성동리)에 가서 독을 쓰고 앉아 있었는데, 광중을 짓다보니 너무 얕아 상주가 도승말을 듣지 않고 바위를 깨니, 도승의 말대로 왕벌 한 쌍이 와서 묘소 주변을 세 바퀴 맴돌고 강화쪽으로 날아 가자 급기야 도승을 데리러 가 보니 도승은 그 나루를 건너지 못한 채 왕벌에게 쏘여 죽었고 산소앞 절도 페허가 됐다.
독우물은 좀 높은 곳에 있는데 1965년 당시 인근 주민이 손질해서 농업용수에 큰 몫을 했으나 지금은 없어졌으며 도승이 독을 쓰고 죽었다하여 독우물이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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