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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사,엄나무,고척산동 귀신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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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적 전설은 그 지역의 지리상의 특징, 자연현상, 동식물의 특수한 형상, 강, 산, 바위 등 특수한 증거물에 대해 소박한 지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기존의 전설에 후세인들이 설명의 요소를 첨가해서 윤색(潤色)된 내용도 상당 수 있다.
설명적 전설은 지역주민과 자연과의 교섭자, 자연과 문화 사이의 교섭자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그것은 지역주민들의 자기인식의 생활사, 문화사라고 할 수 있다.
전설은 전설일 뿐 정사(正史)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지명 '金浦'의 유래에 대한 전설에서는 양천(陽川)의 전설에 '投金浦(灘) → 金浦'로 전해지지만, 1914년 이전에는 김포, 통진 양천이 각각 별개의 군이었다가 같은 해에 3군이 김포로 통합되었으므로 양천과 김포와는 관계가 없었다. 또한 '投金浦'전설의 시대적 배경은 고려 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명 '김포'가 확정된 것은 신라 경덕왕 때이다.
형제투금(兄弟投金)은 전국적으로 전승되어온 형제우애를 주제로 한 민담(民譚)의 화소(話素) 중 하나로 '금덩이를 물에 던지다' → '金浦'의 전설구조를 만들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전설과 역사 사이의 갈등은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삼학사(三學士)의전설

고려말 민(閔)˙임(林)˙주(朱)의 삼학사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명승지를 관광하기로 하고 조강(祖江)을 건너와 현 월곶면 개곡리 사래동을 구경하였다. 세 사람이 모두 지리에 능통한지라, 그 고을의 산들 중에서 가운데 산록(山麓)을 기이하게 여겨 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들 중에서 누구든지 먼저 작고하면 이곳에 안장(安葬)하기로 작성하고 떠났다.
그 후 민학사(閔學士)가 먼저 작고하여 그 자리에 안장했다고 하나 묘소는 실전(失傳)되었다. 그 산이 과연 명당이었던지 민씨의 후손이 번성하여 명문가가 되어 통진에 북민남심(北閔南沈)이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임학사(林學士)는 그 후에 현 개곡리(開谷里) 조산동(鳥山洞)에 안장하였는데, RM 후손들 또한 번성하여 조선말엽에 금운(琴韻), 해사(海史) 두 문장가가 탄생하였으며 한북문장(漢北文章)의 자손은 타처로 이거하였다고만 전할 뿐,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엄나무 전설

김포 장릉(章陵)을 원종왕릉묘(元宗王陵墓)로 정한 성지(聖智)라는 중이 대곶면 거물대리의 등산(登山)산록을 지나다 쉬면서, 엄나무 고목 숲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저 곳에 집을 짓고 살면 9대독자에 12대를 부유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김해배씨가 그 터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까지 후손들 8가구 정도가 살고 있으며, 엄나무 한 그루가 고목으로 남아 있어 도(道)보수가 지정되어 있다.

고척산동 귀신의 전설

마을 산기슭에 약 백년가량 되는 참나무가 서 있는데 예전부터 큰 터줏가리가 있어 매년 동네 집집마다 쌀을 모아 고사를 지내오는데 지금부터 약 60여년 전에 터줏가리 아래에서 머슴으로 살던 유치원(柳致遠)이란 사람이 밤에 밖에 나갔다가 알지 못하게 상투를 잘리워 버렸다.
다음날 아침 찾아보니 터줏가리 근처 덤불속에 그 상투가 있었다. 또한 괴상한 것은 한모(韓某)란 분은 밤중에 역시 변소에 갔다가 신(腎)을 잘리어 상당히 고생하였으나 비교적 장수하였다. 아직도 그 후손들이 그 집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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