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민(閔)˙임(林)˙주(朱)의 삼학사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명승지를 관광하기로 하고 조강(祖江)을 건너와 현 월곶면 개곡리 사래동을 구경하였다. 세 사람이 모두 지리에 능통한지라, 그 고을의 산들 중에서 가운데 산록(山麓)을 기이하게 여겨 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들 중에서 누구든지 먼저 작고하면 이곳에 안장(安葬)하기로 작성하고 떠났다.
그 후 민학사(閔學士)가 먼저 작고하여 그 자리에 안장했다고 하나 묘소는 실전(失傳)되었다. 그 산이 과연 명당이었던지 민씨의 후손이 번성하여 명문가가 되어 통진에 북민남심(北閔南沈)이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임학사(林學士)는 그 후에 현 개곡리(開谷里) 조산동(鳥山洞)에 안장하였는데, RM 후손들 또한 번성하여 조선말엽에 금운(琴韻), 해사(海史) 두 문장가가 탄생하였으며 한북문장(漢北文章)의 자손은 타처로 이거하였다고만 전할 뿐,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김포 장릉(章陵)을 원종왕릉묘(元宗王陵墓)로 정한 성지(聖智)라는 중이 대곶면 거물대리의 등산(登山)산록을 지나다 쉬면서, 엄나무 고목 숲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저 곳에 집을 짓고 살면 9대독자에 12대를 부유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김해배씨가 그 터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까지 후손들 8가구 정도가 살고 있으며, 엄나무 한 그루가 고목으로 남아 있어 도(道)보수가 지정되어 있다.
마을 산기슭에 약 백년가량 되는 참나무가 서 있는데 예전부터 큰 터줏가리가 있어 매년 동네 집집마다 쌀을 모아 고사를 지내오는데 지금부터 약 60여년 전에 터줏가리 아래에서 머슴으로 살던 유치원(柳致遠)이란 사람이 밤에 밖에 나갔다가 알지 못하게 상투를 잘리워 버렸다.
다음날 아침 찾아보니 터줏가리 근처 덤불속에 그 상투가 있었다. 또한 괴상한 것은 한모(韓某)란 분은 밤중에 역시 변소에 갔다가 신(腎)을 잘리어 상당히 고생하였으나 비교적 장수하였다. 아직도 그 후손들이 그 집에서 살고 있다.
게재된 내용 및 운영에 대한 개선사항이 있으면 자료관리 담당자에게 연락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