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통진읍은 현 고막리에 있었는데 조선조 선조때, 우의정 민응형(閔應亨)과 그의 아우 의정부좌찬성 응경(應慶)이 장지를 이 곳에 정한 뒤, 그들의 세도로 읍을 현 군하리로 이전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동네이름 '고읍동'(옛날 읍 고을)과 함께 향교(鄕校)골, 사직(社稷)골 등 공공기관의 이름이 남아 있으나, 그 이상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성면 마곡리에 위치한 동성산은 고려때 토성을 쌓고서 그 이후 '동성산'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북쪽면으로 고려조 항몽전쟁때 말에게 물을 먹인 곳이라 하여 '말 물먹이터'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지금은 양택리 저수지가 그 곳이다.
고려때의 읍터는 지금의 면소재지 자리이며, 이곳 동쪽길가에 현감 신공호청덕선정비(申公護淸德善政婢)가 있던 것을 현 면사무소 앞으로 옮겨 세웠다. 동성산 동남향으로 옥로전(獄爐田)이 있었고, 동성산 서남향으로 원산리 원수골에 약효가 신비한 약수터가 있다. 이런 사실들로 보아 이 곳이 옛날 현이 있던 곳이 틀림 없다.
[여지승람(與地勝覽)] 등 옛 문헌에도 동성현(童城縣)은 통진 동 20리에 있으니 원래 고구려 동자홀(童子惚)이었다가 신라 경덕왕때 동성으로 고였고 고려 공양왕때 통진현에 귀속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부터 50년전 약암 2리에 심성택(沈成澤)씨가 살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매일 아침 저녁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심지어는 밤이 늦어 부모님께서 잠시 들었어도 그는 출타를 하였다 돌아오면 잠드신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야 잠자리에 들곤 하였다. 그가 40여 세에 대곶면장직을 맡고서는 더욱 하루도 거루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도 효성이 지극하던 그가 어느날 양친을 여의었다. 그의 비통함은 말 할 나위가 없었고 그 후 매일 출근시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부모님 묘소를 찾아 인사를 드렸다.
지금도 양쪽 무릎이 닿았던 자리에 잔디가 나오지 않고 그 자리가 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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