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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집 묘역 사진

선조39년(1606)-인조 15년(1637)

김포군에서 태어남
  • 3학사의 한사람.
  • 병자호란때 청나라와 회의를 끝내 반대하여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사형당함
윤집 이미지

1583(선조 16년) 누루하치가 만주지방에서 흩어진 부족들을 정복하여 점차 그 세력을 키워 나라이름을 후름이라 하고, 그의아들 태종이 비옥한 남서쪽 농토를 차지하기 위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후금의 군대는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완의 군사를 무찌르고 의주 땅을 넘어 개성을 향하여 서울로 처들어오자, 나라안에서는 오랑캐의 침략을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으로 인조임금은 강화도로 피난하게 되었다.

"오랑캐의 무리와 화의(화해하는 일)를 맺는 것은 임진왜란때 우리를 도와 왜군을 함께 무찔러 주었고, 수백년동안 형제의 의를 맺은 명나라와 의리를 버릴 수 없으며, 오랑캐와 화의를 맺는 것은 우리 조선의 수치입니다" 젊은 윤집은 오랑캐와 화의를맺는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여s러 대신 앞에서 끝까지 주장하였다. "후금과 화평해야만 우리 조선의 사직은 보존하고 백성들의 무사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적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쪽에서 먼저 평화를 제의하도록 합시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바람 앞의 등잔처럼 위급해지자, 윤집과 척화파(후금과의 화의를 반대하는 대신들)들은 눈물을 흘리며 후금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대신들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고 인조 임금도 서울로 돌아왔다.

후금과의 화의조건은 몇 가지 약속을 남겨 놓았다.

첫째,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넘어서지 말 것 둘째, 후금군은 당장 군사를 물릴 것 셋째, 후금군은 이번에 군사를 물리면 다시는 압록강을 넘기지 말 것 넷째, 두 나라는 앞으로 형제국이라 칭할 것 다섯째, 조선은 후금과 화의를 맺되 명나라를 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두 나라의 대표들이 선서를 하게 되었다. 이때가 바로 정묘년이므로 이 난리를 정묘년에 일어난 오랑캐의 난리라 하며 정묘호란이라고 하였다. 후금의 군대가 물러가고 조선은 후금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무역과 왕래를 해주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명나라 침략을 위한 병선을 요구하고,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자고 하며 황금, 모시, 군서, 전쟁에 필요한 말 등을 요구하여 오기 시작했다. 윤집은 후금의 야만적인 태도에 분을 이기지 못하였으며, 인조 임금도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오랑캐와 맞서 싸울 것을 명령했다. 한편 후금의 세력은 더욱 커져 청나라의 태종은 기마부대를 앞세워 의주에 도착하였고 왕자와 척화파들을 11월 25일까지 청나라로 보내라고 했으며 그렇지 않을시 조선을 침략하겠다고 하였다.

인조임금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청군은 압록강을 건너 6일만에 서울에 당도하여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하였다.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되고 강화도가 점령되어 왕비와 세자 이하 2백여명이 잡혀 남한산성 아래로 호송되었으며, 많은 신하와 부녀자들이 나라를 잃게 된 울분을 참지 못하여 목숨을 던져 자결을 하기도 하였다. 청과의 싸움이 벌어진 지 40여일 만에 인조 임금은 5백여명 신하들의 통곡속에서 한강의 동쪽 삼전도에서 끝내 무릎을 끓어 항보하고 말았다. 이해가 1637년 인조14년 병자년에 일어난 호란이라 하여 병자호란이라 하며, 척화파로 잡혀간 윤집, 오달제, 홍익한은 청에 끝까지 반항하다가 죽음을 당하니, 후세이 이들을 삼학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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